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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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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에바 브라운은 아돌프 히틀러의 오랜 연인이자, 짧은 기간 동안 그의 아내였다. 1912년 뮌헨에서 태어난 브라운은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일하며 히틀러를 처음 만났고, 이후 1932년 말부터 연인 관계를 시작했다. 브라운은 정치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으며, 사치품과 영화를 즐기는 등 특권층의 삶을 살았다. 1945년 4월, 브라운은 퓌러벙커에서 히틀러와 결혼한 후, 같은 해 4월 30일 히틀러와 함께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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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 브라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 베르크호프에서 브라운
1942년 베르크호프에서 브라운
본명에바 안나 파울라 브라운
다른 이름에바 히틀러
출생일1912년 2월 6일
출생지뮌헨, 바이에른 왕국, 독일
사망일1945년 4월 30일
사망 장소베를린, 독일
사망 원인시안화물 중독으로 인한 자살
직업사진가, 하인리히 호프만의 사진 스튜디오에서 사무 및 실험실 조수
종교로마 카톨릭
에바 브라운 서명
에바 브라운 서명
가족 관계
자매일제 브라운
그레틀 브라운

2. 어린 시절

에바 브라운의 어머니, 프란치스카 브라운


1930년대 에바 브라운의 부모, 프란치스카 크론베르거와 프리드리히 브라운


에바 브라운은 1912년 2월 6일 뮌헨에서 학교 교사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프리츠" 브라운(Friedrich "Fritz" Braun, 1879–1964)과 재봉사였던 어머니 프란치스카 "파니" 크론베르거(Franziska "Fanny" Kronberger, 1885–1976)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에게는 세 살 위의 언니 일제(Ilse, 1909–1979)와 세 살 아래의 여동생 마르가레테(그레틀, Margarete "Gretl", 1915–1987)가 있었다. 아버지는 루터교 신자였고 어머니는 가톨릭 신자였다.

브라운의 부모는 1921년 4월 이혼했지만, 1922년 11월 재혼했다. 이는 당시 독일 경제를 강타한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재정적 이유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브라운은 뮌헨의 가톨릭 리세를 다녔고, 이후 짐바흐 암 인에 있는 영국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상업 학교에서 1년간 공부했다. 학업 성적은 평균 수준이었으나, 운동에는 재능을 보였다.

17세 때 브라운은 나치당(NSDAP)의 공식 사진작가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게 점원 및 판매원으로 일했지만, 곧 카메라 사용법과 사진 현상 기술을 배웠다.

1929년 10월, 뮌헨에 있는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당시 40세였던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 히틀러는 자신을 "헤르 볼프"(Herr Wolff)라고 소개했다. 에바의 여동생 그레틀 역시 1932년부터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자매는 한동안 함께 아파트를 임대하여 살았다.

3. 히틀러와의 관계

1929년 10월, 17세의 에바 브라운은 뮌헨하인리히 호프만 사진 스튜디오 조수로 일하던 중, 23세 연상인 아돌프 히틀러를 처음 만났다.[5] 히틀러는 브라운의 눈 색깔이 자신의 어머니 클라라와 닮았다며 호감을 보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히틀러는 이복 조카 겔리 라우발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1931년 9월 그녀가 히틀러의 권총으로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5][6] 히틀러는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후 브라운과 더 자주 만나기 시작했다.[5]

1932년 8월(또는 11월[5]), 브라운은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했다. 이것이 히틀러의 관심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다는 해석이 있다.[6] 브라운이 회복된 후 히틀러는 그녀에게 더욱 헌신했고, 1932년 말 무렵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다.[6] 히틀러가 뮌헨에 머물 때는 그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기도 했다.[5] 1933년부터 브라운은 호프만 밑에서 사진사로 일하며 나치당 전속 사진사였던 호프만과 함께 히틀러의 공식 일정에 동행할 수 있었다.[6]

1935년 5월, 브라운은 히틀러가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여 두 번째 자살을 시도했다.[6] 이후 히틀러는 브라운 자매에게 뮌헨에 아파트를, 이듬해에는 보겐하우젠에 빌라를 마련해주었다.[6] 1936년부터 브라운은 히틀러가 베르크호프에 머물 때 함께 지냈지만, 주로 뮌헨에서 생활했다.[6]

1935년 4월, 에바와 히틀러


히틀러는 정치적인 이유로 미혼 이미지를 유지하려 했기에 브라운과의 관계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6] 두 사람이 공개 석상에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거의 없었으며, 독일 국민 대다수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들의 관계를 알지 못했다.[6] 1935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에 브라운이 호프만의 직원으로 참석하자, 히틀러의 이복 누나 안겔라 라우발은 불쾌감을 표시했고 이후 베르크호프를 떠나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히틀러 측근들은 브라운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되었다.[6] 브라운의 가족 역시 이 관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5]

3. 1. 정치적 영향력 부재와 사생활

전기 작가 하이케 괴르테마커(Heike Görtemaker)는 나치 독일의 정치에서 여성의 역할이 미미했다고 평가한다. 에바 브라운 역시 히틀러에게 미친 정치적 영향력은 거의 없었다. 그녀는 사업이나 정치 관련 논의가 있을 때, 또는 내각 각료나 다른 고위 인사들이 방문했을 때는 자리를 비켜야 했다. 브라운은 평생 나치당 당원이 아니었다.

사진가 호프만은 전후 회고록에서 브라운을 "무의미하고 경박하다"고 묘사했으며,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스포츠, 옷, 영화였다고 전했다. 브라운을 알았던 이들은 그녀가 정치에는 무관심했으며, 보호받는 특권적인 삶을 누렸다고 증언한다. 그녀가 정치 문제에 드물게 관여한 사례는 1943년 독일이 총력전 체제로 전환하면서 여성의 화장품과 사치품 사용 금지가 논의되었을 때였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브라운은 이 조치에 강하게 반발하며 히틀러에게 불만을 표했고, 히틀러는 당시 군수부 장관이었던 슈페어에게 관련 물품 생산을 즉각 금지하는 대신 점진적으로 중단하도록 조용히 지시했다. 슈페어는 훗날 "에바 브라운은 역사가들에게 큰 실망을 안겨줄 것입니다."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히틀러와의 관계가 시작된 후에도 브라운은 호프만 밑에서 계속 일했다. 그녀는 히틀러 측근들의 사진과 영상을 다수 촬영했으며, 일부는 호프만에게 높은 가격에 판매했다. 1943년까지 호프만의 회사에서 급여를 받았고, 동시에 히틀러의 개인 비서 역할도 수행했다. 이 직책 덕분에 그녀는 외부의 시선을 피해 옆문과 뒷계단을 이용하여 총리 관저 내 히틀러의 공간에 출입할 수 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을 순결한 영웅 이미지로 포장하길 원했고, 여성 유권자들의 지지를 잃을 것을 우려해 미혼 상태를 유지했다. 이 때문에 히틀러와 브라운의 관계는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며, 독일 국민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야 두 사람의 관계를 알게 되었다. 그들이 함께 언론 사진에 등장한 것은 1936년 동계 올림픽 당시 브라운이 히틀러 근처에 앉아 있던 모습이 유일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브라운은 베르크호프나 베를린의 총리 관저, 벙커 등 어디에서도 히틀러와 같은 침실을 사용하지 않고 항상 개인 방을 가졌다. 그러나 전기 작가 괴르테마커는 두 사람이 정상적인 성생활을 했다고 기술한다. 브라운의 친구들과 친척들은 그녀가 1938년 네빌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뮌헨 아파트 소파에 앉아 있는 사진을 보며 "그 소파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가 알았다면..."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던 일화를 전하기도 했다.

히틀러는 때때로 브라운을 멸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며, 그녀에게 흡연이나 다른 남성과 춤추는 것을 금지했다. 브라운은 이러한 제약에 불만을 느끼고 히틀러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6] 전쟁 중 브라운은 주로 로맨스 소설을 읽거나 친구들과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에 관심이 많아 개인 암실을 가지고 있었으며, 히틀러의 스틸 사진과 영상 필름을 직접 현상하기도 했다.[6] 가톨릭 신자였던 그녀는 베르히테스가르덴의 가톨릭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고 전해진다.[6]

3. 2. 베르크호프에서의 생활

1933년 히틀러오버잘츠베르크 산중에 작은 별장을 구입했고,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개조 및 확장을 통해 베르크호프를 완성했다. 원래 집에 큰 별채가 추가되었고 여러 부속 건물이 건설되었다. 전 지역은 울타리로 둘러싸여 외부와 차단되었으며, 산중의 다른 집들은 나치가 매입하여 철거했다. 알베르트 슈페어, 헤르만 괴링, 마르틴 보어만 등 나치 고위 인사들도 이곳에 각자의 집을 가지고 있었다.[1]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가 베르크호프에 머물 때 함께 지냈으나, 외부 세계와는 단절된 생활을 했다.

베르크호프 테라스에서 에바와 히틀러. 오른쪽은 히틀러의 애견 블론디(1942년6월 14일 촬영)


에바가 추천한 히틀러의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왼쪽 뒤)과 과거 고용주 하인리히 호프만(오른쪽 앞). 1940년경 베르크호프에서 에바 본인이 촬영한 영상


히틀러의 집사였던 하인츠 링게와 군수상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와 브라운은 베르크호프에서 중간 문으로 연결된 별도의 침실과 욕실을 사용했다. 히틀러는 저녁 시간을 주로 서재에서 브라운과 단둘이 보낸 후 각자의 침실로 향했다.[2][3] 브라운은 보통 가운이나 실내복 차림으로 와인을 마셨고, 히틀러는 를 마셨다. 폐쇄적인 베르크호프 내에서도 두 사람 사이의 공공연한 애정 표현이나 신체적 접촉은 거의 없었다.[2]

브라운은 베르크호프 방문객들 사이에서 안주인 역할을 했지만, 실제 살림에는 관여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친구나 가족들을 베르크호프에 초대하여 함께 시간을 보냈는데, 이는 다른 손님들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특권이었다.[4] 브라운은 정치나 히틀러의 사상에는 무관심했고, 평생 나치당원이 되지 않았다. 그녀의 주된 관심사는 패션, 음악, 영화 등이었다. 히틀러가 각료들과 정치 이야기를 시작하면 브라운은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3] 히틀러는 때때로 브라운에게 멸시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했으며, 흡연이나 다른 남성과의 춤을 금지하는 등 그녀를 속박하려 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벌어지기도 했다.[3] 전쟁 중 브라운은 연애 소설을 읽거나 친구들과 영화를 보며 시간을 보냈다. 사진 촬영에도 취미가 있어 자신의 암실을 가지고 있었고, 히틀러의 스틸 사진이나 영상, 심지어 자신이 알몸으로 일광욕하는 모습 등을 촬영하고 현상하기도 했다.[5] 가톨릭 신자였던 브라운은 베르히테스가덴의 가톨릭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고 로후스 미슈는 회고했다.[6]

브라운은 네구스(Negus)와 스타시(Stasi)라는 이름의 스코티시 테리어 두 마리를 매우 아꼈으며, 이 개들은 그녀가 촬영한 홈 무비에도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자신의 개들을 히틀러의 저먼 셰퍼드블론디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 했다.[8] 1945년 4월 29일, 히틀러는 청산가리 캡슐의 효능을 시험하기 위해 블론디에게 먹여 죽게 했다. 다음 날인 4월 30일, 브라운의 개 두 마리와 블론디의 강아지들은 히틀러의 개 조련사였던 프리츠 토르노프에 의해 사살되었다.[9]

1944년 6월, 브라운의 여동생 그레텔이 친위대 장교 헤르만 페겔라인과 결혼하게 되자, 히틀러는 처음으로 브라운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했다. 결혼 파티는 오버잘츠베르크의 또 다른 산장인 켈슈타인하우스에서 열렸다.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에게 "전쟁이 끝나면 은퇴하여 린츠로 가서 에바를 아내로 삼겠다"고 말한 바 있다.[7] 헨리에테 폰 시라흐가 전쟁 후 숨어야 한다고 조언했을 때, 브라운은 "내가 그를 혼자 죽게 놔둘 것 같아요? 나는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할 거예요..."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히틀러는 유언장에서 브라운에게 사후 매년 12,000 라이히스마르크를 지급하도록 명시했다. 히틀러는 브라운을 매우 아꼈으며, 그녀가 스포츠를 하러 가거나 차 마시는 시간에 늦으면 걱정하곤 했다고 한다.

4. 결혼과 자살

1945년 4월 초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와 함께 있기 위해 뮌헨에서 베를린으로 이동했다. 그녀는 소련군이 밀어닥치는 가운데서도 수도를 떠나라는 가족들의 설득을 뿌리치고, 4월 중순에는 벙커로 피신하여 마지막까지 히틀러와 함께 있기로 결정했다. 히틀러 측근에 대한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의 조서에 따르면, 에바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죽음이 마지막 도피처가 될 것입니다. 그때는 법적인 아내로서 그분과 함께 죽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8]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4월 20일 붉은 군대베를린에 침공을 시작했고, 4월 29일 새벽 히틀러와 브라운은 벙커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이 결혼식에는 요제프 괴벨스마르틴 보어만이 증인으로 참석했다. 에바는 결혼증명서에 서명할 때 원래 성인 브라운(Braun)의 'B'까지 썼다가 줄을 긋고 'Eva Hitler'라고 고쳐 썼다. 결혼 후 에바는 주변 사람들이 자신을 Frau Hitler|플라우 히틀러de(히틀러 부인)라고 불러주기를 원했다.

다음 날인 1945년 4월 30일 오후 1시가 지나 브라운과 히틀러는 벙커에 남아있던 수행원들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오후 3시 30분경, 두 사람은 작은 서재 소파 위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에바는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고, 히틀러는 청산가리 캡슐을 깨문 직후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에바 브라운의 나이는 33세였다. 두 사람의 시신은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벙커 비상구를 통해 수상관저 뒤뜰로 옮겨져 가솔린을 뿌려 소각되었다.

소련군은 불타고 남은 유해를 발견했다. 5월 11일, 히틀러의 치과 진료 기록을 통해 유해가 히틀러와 브라운의 것임을 확인했다. 소련 측은 이 유해들을 비밀리에 동독 마그데부르크의 SMERSH 시설 구내에 괴벨스 부부와 그 자녀들의 유해와 함께 묻었다. 1970년 4월 4일, 소련 KGB는 매장 기록에 따라 유해가 담긴 나무 상자들을 발굴하여 완전히 소각한 뒤, 재를 엘베강의 지류인 비데리츠강에 뿌렸다.

5. 사후

소련군이 발견한 남녀의 유해는 히틀러를 진찰했던 치과 의사 후고 블라슈케의 조수에 의해 감정되어, 히틀러와 에바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히틀러 부부의 유해는 괴벨스,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 괴벨스의 아이들, 한스 크렙스 참모총장,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육군 인사국장, 히틀러의 애견 블론디의 유해와 함께 스메르시의 지휘 아래 여러 차례 매장지가 옮겨졌다. 최종적으로는 1946년 2월 21일 마그데부르크의 클라우스너 거리에 위치한 스메르시 시설 앞뜰 포장 구역 아래, 표식 없는 묘지에 매장되었다. 이 장소는 비밀에 부쳐졌다.

그러나 유해 매장지는 1970년 KGB의 통제 하에 동독 정부로 이관될 예정이었다. 히틀러의 매장 장소가 네오나치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KGB 의장 유리 안드로포프는 유해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KGB의 발굴팀 "아르히프"는 상세한 매장 장소를 지시받고, 1970년 4월 4일 비밀리에 10구의 유해를 발굴하여 완전히 소각한 뒤, 재를 엘베강의 지류에 산골했다.[9]

모친 프란치스카를 중심으로 부친 프리츠, 언니 일제, 여동생 그레텔과 에바 (1930년대)


전쟁 후, 에바의 가족들은 살아남았다. 부모는 바이에른주 루폴딩의 낡은 농가에서 지냈으며, 아버지 프리츠는 1964년에,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1976년 1월 9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여동생 그레텔 브라운은 히틀러의 측근이었던 헤르만 페겔라인과 결혼했으나, 페겔라인은 1945년 4월 도주 혐의로 처형되었다. 그레텔은 1945년 5월 5일 딸을 출산하여 언니의 이름을 따 에바라고 이름 지었다. 그녀는 이후 실업가 쿠르트 베링호프와 재혼했고, 1987년에 사망했다. 언니 일제는 히틀러의 측근이 아니었으며, 두 번 결혼했고 1979년에 사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Dom Ewy Braun - jak dotrzeć, jak dojechać https://pobierowo.ne[...] 2024-04-19
[2] AV media Willa Ewy Braun https://tv-polska.eu[...] 2024-04-19
[3] 서적 ローフス・ミッシュ『ヒトラーの死を見とどけた男 地下壕最後の生き残りの証言』「カトリック教徒 エーファ・ブラウン」の章から
[4] 문서 日本語で'''Eva'''は「[[エヴァ]]」と表記されることが多いが、[[ドイツ語]]の発音はエーファに似る。[[:wikt:de:Eva|Eva]] (Wiktionary)も参照のこと。
[5] 서적 アドルフ・ヒトラー 集英社文庫 1990-04-17
[6] 서적 ローフス・ミッシュ『ヒトラーの死を見とどけた男 地下壕最後の生き残りの証言』「カトリック教徒 エーファ・ブラウン」の章から
[7] 서적 ネリン・E・グーン『エヴァ・ブラウン ヒトラーの愛人』190頁。
[8] 서적 ヒトラー・コード 講談社 2006-01-26
[9] 웹사이트 Hitler's death - later Russian disclosures http://www.spiritus-[...] 2008-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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